몇 년을 굶은 엄마표 동치미를 올해는 먹을 수 있을까?
노는 땅 그냥 두고보지 못하는 것 또한 농부의 마음, 결국 상반기 농사 실패를 견디고 김장 농사에 도전하기로 결심.  
황무지에서 폐가로 변해가던 텃밭을 정리하러 갔더니, 무성한 잡초 복판에 딸기가 무성하게 뻗어 있었다. 
식목일에 심어 같이 심은 것 늦추위에 다 죽고 오월에 심은 것 장마에 다 죽어나가는 와중에 홀로 꿋꿋이 살아남은 거다.  
올해말까지만 허용된 땅이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실외기 위에서도 그 생명력 유구할까?  

잡초 뽑고 땅 갈아엎고 퇴비 먹이고 멀칭비닐 치고 일주일 기다렸다. 
김장까지 시간이 밭아서 배추는 모종으로 열다섯 포기 심고 무는 동치미 무씨로 촘촘히 열다섯 구멍에 뿌렸다. 
각각 서너 뿌리 빼고 잎이 나고 싹이 나왔다, 고 좋아하고 있는데 지난주에 장마급 비가 내렸다. 
1차 실패에 트라우마가 깊었는지, 노심초사하다가 또 다시 당할 수 없다는 엄마 둘과 의기투합하여 직접 삽질로 물길을 텄다. 

땅은 정직하다. 삽질하니까 길이 생기고 길이 생기니까 물이 흐른다. 
물이 흐르고 드러난 맨흙에는 머나먼 기억 속에 있거나 책에서 보았던 각종 생명들이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면밀히 들여다보니 무싹이나 배춧잎에 벌써 갉아먹힌 자국이 있었다. 
네녀석들 짓이렷다. 
굵은 나뭇가지 하나 주워다 먼 데로 옮겨주었다. 
생명의 존엄성은 상대적 가치인 모양이다. 

농사라고는 하지만, 땅 고르고 씨 뿌리고 나면 막상 별로 할 일이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여름엔 맨흙이어서 잡초 뽑기에 바빴지만 이번엔 (옆줄 엄마들의 조언과 나눔 덕분에) 비닐을 쳐놔서 잡초 뽑을 일도 없고. 
태풍은 요행히 피해간 것 같고, 해와 바람은 무한하고, 날짜와 날씨가 벌어질 것 같으면 비가 알아서 땡겨줄 거고.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뛰어놀 것이고, 어른들은 텃밭과 모래밭 번갈아보며 아이들은 모르는 세계를 공유할 것이고. 
해 저물면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아이들을 재촉할 것이다. 
아이들은 버틸 것이고, 아이들 머리 위에는 빨간 고추잠자리 어른거릴 것이고, 
어른들은 달콤한 공갈로 유혹할 것이고,
결국에는 공갈을 물질적 보상으로 환원하는 법을 깨친 아이들이 승리할 것이다. 
어른들은 이 달콤한 패배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꿈꿀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일은 정한 마음으로 비는 것뿐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정한 마음으로 비나이다, 
우리 뿌린 씨앗, 질풍 돌풍 삭풍 편서풍, 부지런한 벌레 응큼한 즘승 다 이기고, 온전히 맺어 거두기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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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타친구 | 2013/09/17 23:09 | 가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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